초상화 : 그림으로 쓰는 전기(傳記)
김 윤 태 (문학평론가)
필자는 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미술에 대해서는 실은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금릉(金陵)이 내게 ‘서발류’(序跋類)에 속할 법한 이런 글을 부탁한 것은 아마도 미술계 바깥의 시각에서 자신의 그림세계를 들여다봐달라는 주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거절하지 못하고 청탁에 응대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문학(글)과 미술(그림) 사이에 통하는 지점을 찾아보는 일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감히 도전해 보았다.
국어사전에서는 ‘초상화’(肖像畵)를 “사람의 얼굴이나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풀이는 너무 포괄적이라 좀 더 한정해서 말하면, “초상화는 한 개인을 회화, 드로잉 또는 사진 등으로 재현한 미술의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초상화는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없는 개인의 얼굴과 신체를 재현하여 그 특유한 성격, 동작, 사회적 지위, 성, 연령, 직업 등을 드러낸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의에서 우선 포착되는 개념은 ‘재현’(再現)이다. 말 그대로 “다시 드러냄”을 가리키는데, 실물인 것처럼 화폭에다가 개인의 얼굴이나 신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을 뜻한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것처럼 솔거가 그린 황룡사 벽화의 노송도에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사실의 투철한 ‘재현’을 잘 웅변해주는 사례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는 이러한 재현을 ‘미메시스’(mimesis)라고 했거니와 오늘날의 문학에서는 ‘리얼리티’(reality)라고도 이르는데, 이는 다 사실 묘사의 ‘핍진(逼眞)함’과 관련된 말들이다. 동양의 초상화 전통에서도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요소인 모양이다. 북송의 성리학자 정이(程頤)가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 便是他人)라고 했다는 말도 바로 이 핍진성에 대한 강렬한 요청일 것이다.
또 하나 위의 정의에서 주목할 대목은 “특유한 성격(…) 등을 드러낸다”라는 점이다. 그림으로 그려진 얼굴을 보고서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람의 성격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일이긴 한 것일까? 문학에서는 인물 묘사를 통해 이른바 ‘성격화’(characterization)에 이른다고 하는데, 미술에서는 어떻게 그것에 이를 수 있을까? 금릉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초상화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그때마다 전시회 제목을 “초상(肖像) 그 전신(傳神)의 세계”로 정하였다. 여기서 ‘전신’(傳神)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 뜻을 축자적으로 풀이한다면 “정신이나 혼[神]을 전하거나 옮긴다”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초상화를 통해 그 인물의 정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신이란 인물이나 사물이나 자연세계
의 내재적 정신 본질을 표현함을 뜻”하는 것으로, 결국 초상화가 그 대상(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데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전신’이란 말은 초상화의 기법이나 방식이 아니라 그것의 궁극적 목표나 지향이라는 점을 압축한 것이다.
이처럼 ‘전신’이 초상화가 최종적으로 다가가야 할 본질과 같은 것이라면, 이를 문학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그림 대신에 글을 통해 한 개인의 생애와 정신 혹은 성격을 더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문학의 장르에도 그런 게 있다. 바로 ‘전기’(傳記)이다. 그래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필자가 젊은 시절에 문학이론 공부를 할 적에 ‘문학적 초상화’(文學的 肖像畵)라는 용어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는 문학이론이나 비평 분야에서 쓰이는 개념이지만, 그다지 널리 알려진 말은 아니다. 문학적 전기(Literary Biography)의 종류를 나눌 때 그 하위개념으로 사용된 것인데, 리온 이들(Leon Edle)은 그것을 ①포괄적 연대기(chronicle compendium), ②문학적 초상화(literary portrait), ③유기적 전기(organic biography)의 세 가지 형태로 나눈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문학적 초상화’는 바로 화가가 그린 초상화처럼 어떤 작가에 대한 시각적이면서 간단한 전기로서, 성격소묘(sketch)나 프로필(profile) 등이 이에 속한다고 했다.
그런데 미술의 초상화에서 ‘전신’의 개념이 이 문학적 초상화의 단계 너머를 지향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초상화 속의 인물이 지닌 성격이나 지위, 성, 연령, 직업 따위를 온전히 표현해내려면, 즉 ‘전신’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더 높은 단계의 문학적 전기와 견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기적 전기’(혹은 비평적 전기)라 하겠다. 이 문학적 용어에 대한 설명을 미술 영역으로 치환해서 읽어보자.
비평가[화가]는 주어진 자료를 한데 뒤섞어 ‘용해’한 다음, 자기가 해석하는 방향으로 작가[대상 인물]의 정신적 모습을 재구성한다. 그[화가]는 자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작가[인물]에 관하여 이야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자기[화가]가 직접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갈 뿐 아니라 취급 대상이 되어 있는 작가[인물]의 성격에 따라서 적절한 이야기의 형식을 취한다. (…) 비평적 전기[초상화]는 비평가[화가]의 해석에 따라 이야기의 형식과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요컨대 초상화는 화가의 해석에 따라 그 형식과 방법이 달라진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전신’의 세계란 인물의 내면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화가의 해석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즉 화가의 상상력과 개성적 자유가 활짝 꽃피어야 한다는 것이지 않겠는가.
이에 대한 적절한 예시가 금릉의 만해선사 진영 제작 후기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후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필자가 문학 전공자라는 점과 관련된다. 만해가 님의 침묵이란 시집을 낸 시인이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거니와, 한국 현대시를 전공했던 필자로서는 금릉의 초상화들 중에서 만해의 초상에 당연히 눈이 가게 된다.
만해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가 출가한 후 1911년(33세) 동북 삼성을 주유하면서 독립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본 첩자로 오해를 받아 독립군 청년에게 피격당해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목 부분의 총상 후유증으로 평생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한다. 이러한 모습은 만해가 이후의 삶 동안 내내 유지해 온 실재
적인 신체 자세이기도 하지만 독립운동가로서 최후까지 변절하지 않은 그의 저항정신과 일본이 그들의 불교와 조선의 불교를 통합하려 한 행위를 규탄하고 저지하면서 조선의 불교를 지키고 바로 세운 그의 활발한 불교 활동을 대변할 만한 상징적인 자세로 여겨졌다.
이에 만해의 진영을 제작함에 있어 (…) 다소 비뚤어진 자세와 형형한 눈빛을 취하여 그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금릉의 이러한 진술은 이 초상을 그리기 위해 그가 만해 선생의 ‘전기’를 얼마나 열심히 읽고 연구했으며 아울러 만해의 이미지를 찾아다니며 기울였을 많은 공력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겨우 네댓 장밖에 남아 있지 않은 만해의 사진을 찾아 분석하고 탐색했는지가 그 후기에 잘 설명되어 있다. 특히 “목 부분의 총상 후유증으로 평생 고개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라는 대목, 이것은 만해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다면 쉽게 발견하기 어려웠을 지점이다. 금릉은 예리하게도 그 지점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포착하여 고개가 살짝 기울어지고 삐딱하게 틀어진 포즈를 완성해낸 것이다. 그러한 포즈는 형형한 눈빛과 파르라니 민 머리와 더불어 만해 선생의 결기를 확 느끼게 한다.
우리는 금릉이 창조해낸 만해의 초상에서 만해의 올곧고 고집 센 성격과 저항 정신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신이 초상화를 그릴 때 외모의 형사뿐만 아니라 내재된 정신성까지 사생해낸다고 할 때, 이 점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이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금릉은 “이 초상이 만해를 왜곡하는 또 다른 이미지 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 말은 단지 겸사에 지나지 않는 것. 또 초상화의 체화적 기능에 대해 “회화가 한 사회의 문화적 원리를 구현하고 이에 대한 인식적 각성을 촉구한다”라고 말할 때도 역시 이 작품은 그것에 충분히 값할 만하다고 본다. 초상화를 통해 만해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더 강렬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계몽적·교육적 효과마저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금릉의 만해 초상이야말로 ‘비평적 전기’(critical biography)로서의 초상화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금릉은 ‘전신’을 통해 만해의 삶(인격)을 그야말로 재창조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초상, 그 전신의 세계(3) -금릉 김현철
2017.10.18~10.24
한벽원미술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