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김현철 화백ⓒ 정인권 기자

시간을 거슬러 공간을 만나다

금릉(金陵) 김현철 화백 <...대상을 보고 바로 그리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뒀다가 우려내는 과정에서 여백이 나옵니다. 여백에는 수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데, 작가가 모두 담아버리면 보는 사람이 더는 상상할 수가 없어요. 어느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바로 여백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시한 거죠...> 김 화백의 화폭에 담긴 궁궐은 적막하고 오래된 유적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곳에서 추억을 말하듯 생생하기만 하다. 한국화가이자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인 금릉 김현철 화백(51). 그는 조선시대 진경(眞景)산수화와 인물화의 전통적인 맥을 잇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으로 조명해낸 작가다. 불국사, 경복궁 등이 그의 화폭에서 다시 태어났다. 경기도 산본 화실에서 김 화백을 만났다.

- 경복궁(景福宮)>의 구름과 여백에는 이야기가 담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렸어요. 궁궐인 경복궁은 왕과 왕실의 거처로써 한 때는 이들 왕족뿐만 아니라 궁녀, 내시, 관원, 군인, 노복 등 온간 신분과 계층의 사람들이 삶을 이어갔던 곳입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건과 사연들로 점철되었겠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전혀 그리지 않고 전각들만 무심히 그렸어요. 비워둠으로써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과 느낌에 비추어 상상을 하게 하는 거죠. 이는 감상하는 사람의 몫이에요.

- 궁궐 그림을 그릴 때 반듯한 부분은 자를 대고 그리지 않으세요?

궁궐 같은 건축물을 그린 계화(界畵)에는 자를 대고 그리는 방법이 있어요. 이전 <불국서색(佛國瑞色)>을 그릴 때는 불국사의 전각들을 자를 대고 그렸었는데 그림이 너무 경직돼 보였죠. 그래서 <경복궁>을 그릴 때는 자를 대지 않고 그렸어요. 그릴 때 약간씩 비뚤비뚤하게 그어진 선들이 오히려 그림을 보기 편하게 하는 것 같아요.

- 경복궁은 그리는데 얼마나 걸렸죠?

약 7개월이요. 그리겠다고 한 후, 경복궁을 둘러보고, 경복궁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과 사진 등 모든 자료를 수집하고, 밑그림으로써 큰 윤곽을 잡고, 경복궁을 찾아 현재 남겨진 전각들은 스케치하고 유실된 전각들은 옛 자료를 통해 그린 다음, 궁궐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여 고칠 것은 고치고, 그렇게 해서 밑그림을 최종 완성했어요. 그 후 비단을 밑그림 위에 올려 비쳐나오는 궁궐의 전각들의 모습을 쫓아 그리고 그 주변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을 병풍처럼 둘러 그리니 이러한 작업 모두를 마치는 데 그 정도 걸렸어요.

- 규모가 커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나요?

사실 궁궐의 건물이 아니라 이보다 나중에 그린 구름이었어요. 가장 시간이 오래 걸렸고 가장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경복궁의 각 전각들은 스케치가 되어 있는 밑그림에 따라 그려나가면 되는데 구름의 형상들은 실제로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꾸 듯이, 스케치없이 그리는 순간순간 주변 상황에 맞게 그리려고 했던 거예요. 왜냐하면 화면 아래부분의 궁궐 전각들을 진채화법으로 그리니 다소 경직돼 보였어요. 그래서 그림 전체 음양의 조화를 위해 궁궐과 북악산, 인왕산 사이의 구름의 표현은 보다 자유롭고 유연성있게 표현함으로써 화면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던 거죠. 이 때 자칫 구름이 잘못 그려지기라도 하면 몇 달 동안 그린 게 다 허사가 되니까 얼마나 긴장이 되었겠어요.

-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기본기가 많이 요구되겠지요.

물론이죠. 3~4년 전부터 그런류의 작업들을 해 왔었어요. 2004년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모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는데, 그 중에서 <동국대전도>와 <북새선은도> 2점을 모사했었죠. 그 후 이를 응용하여 처음 그린 게 수원에 있는 화성을 그린 <화성전도(華城全圖)>입니다. 궁궐도 같은 경우는 답사를 다녀야 하는데 직접 발로 다 밟아봐야 하고, 이에 대한 기초 자료도 찾고, 전체적인 작업 계획을 세워 구체적으로 이를 하나하나 그려 나가게 되는 거죠. 이 모든 과정이 상당한 시간과 다양한 기본기를 요구하게 됩니다.

-얼마나 자주 가셨나요?

그리다가 막히면 바로 가야죠. 한 스무 번 가까이 갔을 것 같은데, 사진촬영을 해 와도 시점이 다르면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요. 수시로 다시 가서 확인하곤 했어요. -옛날엔 사진기도 없었잖아요. 대신 그 모습을 마음속에 담은 것 같아요. 겸재는 사생을 다녔어도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 이를 재정리 했어요. 필요한 것만 그려내는 거죠. 가장 그 다운 맛, 곧 진경(眞景)이죠.

-산수화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 과정에서는 전통적인 우리회화에 대한 것 보다는 서구적인 미감을 근거로 한 동양화를 했던 것 같아요. 직접 그리기 보다는 뿌리고 붙이는 작업을 했었죠. 그런데 하면 할수록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고민하다가 뒤늦게 다시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고 생각했죠. 처음부터 산수화가 좋아서 한 건 아니고 그림공부를 위해 산수화라는 장르를 선택했을 뿐인데, 산수그림 속에 동양회화의 모든 정신과 다양한 화법이 다 담겨 있더라고요.

-산수화는 단순히 옛날작품으로 생각하고, 그림을 즐기는 사람들은 적은 것 같은데요.

전통과 단절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 것을 버리면 선진화, 현대화된다고 생각했죠. 학교 교육의 미술과목을 들여다보면 서양화가 주류를 이루고 동양화는 마지못해 몇 작품 넣어 이를 소개하는 정도이잖아요. 그러니 동양화를 전공하지 않고서는 우리 회화에 대해서 더더욱 모르죠. 우리 그림으로 어떤 게 있는지도 모르고 또 어떤 면이 좋은지... 찬찬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단지 낡은 그림이라고만 생각을 해요.

-전통문화에 대해서 고루해 보인다는 사람들도 있어요. 달라진 점이 별로 없고 늘 똑같아 보인다는 거죠.

사실 그 부분이 가장 큰 숙제인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과거의 그림을 배웠어도 저는 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제가 그리는 그림이 과거와 같은 그림이 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그게 아니니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지 않냐고 강요할 수도 없죠.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오늘이 어제와 다르듯이 긴 시간을 두고 보면 확연히 다른 모습이 보이게 되겠죠.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동양화가 고루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어느 그림이나 다 고리타분하다고 단순 치부해 버리는 것 같아 아쉬워요. 화랑에서 조차 누가 요즘 산수화를 보느냐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하죠.

-술은 하시나요. 사생하러 갔다가 술 한잔하면 돌아와서 잊어버릴 수도 있지 않나요. 조금씩은 합니다. 술에 취해 희미해지는 게 오히려 나을 때도 있어요. 희미해진다는 것은 필요 없는 게 잊히는 거죠. 그러나 진짜 중요한 그 느낌은 결코 잊지 않거든요. 어떤 그림은 스케치를 다녀와서 몇 년 후에 그리는 일도 있어요. 자질구레한 것들은 다 잊고 아직껏 마음속에 남아있는 그 감동을 그리는 거죠.

-어느 영화에선 화가가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던데.

술 한 잔 마시고 막 그리는 것은 시끄러운 잡음과 같아요. 그림 그리는 순간에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려야 할 텐데 막 그려서야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뺏을 수 있겠어요. 축구선수가 아무리 축구를 잘한다 해도 술 취해 그라운드에 나서면 안 되겠죠. 최고로 정신을 집중하고 가장 맑은 상태에서 작업해야지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며 이게 예술행위가 아닐까요.

-원래 산을 잘 타셨어요?
 
산수화를 공부하기 전에는 산에 잘 가지 않았죠. 그림 그리면서 산이 좋아졌어요. 얼마 전엔 후배가 백두대간의 사계(四季)를 화폭에 담아 보라며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지원하겠다고 나섰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시작해보려고 해요. 그는 지난해 초상화 전시회도 열었다. 기자를 만나기 전 마침 초상화를 작업하던 중이었다. 그는 10cm 높이의 나무를 궤고 얹은 내왕판 위에 앉았다. 스케치 위에 팽팽한 비단을 올리고 둥그런 돌로 지그시 눌렀다. 비단 위로 스케치가 옅게 비쳐 나왔다. 녹인 아교에 석채를 섞어 엷은 색으로 붓을 대자 희미했던 입술이 살포시 드러났다. 비단의 뒷면에도 색을 칠해서 은은하게 색이 배온다고 했다. 비단 그림의 묘미였다.

- 초상화에도 내면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네요.

초상화에서는 이를 전신(傳神)이라고 하죠. 외모의 형상뿐만 아니라 내재된 정신성까지 사생해 낸다는 뜻이에요. 초상화에서는 흔히 쓰는 말이지만 동양화 자체에 다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 항상 도록을 펴놓고 하시나요?

산수화 그릴 땐 산수화 책을, 초상화를 그릴 땐 초상화 그림책을 항상 옆에 펴놓고 있어요. 그림 그리다 보면 딱 막힐 때가 있거든요. 그럴 때 화집을 이렇게 넘기다 보면 그 속에 답이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화집 속에 있는 그림의 작가와 다르게 해석하여 작업할 수도 있어요. 기법을 항상 연구하면서 이를 그리는 그림에 맞게 응용하여 적용하는 거죠. 대상인물의 전신(傳神)인 참모습을 나타내기 위해서...

- 마음을 가라앉혀야 이런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마음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면요.

가능한 그 대상에 충실하려고 해요. 그러는 과정 중에 마음이 정리되는 거죠. 동양화 제작을 위한 준비과정 자체가 그래요. 주변이 항상 깨끗해야 하는데, 특히 초상화제작에 있어서 얼굴을 그려야 하는 비단위에 먼지 하나만 묻어 있어도 나중에 물감이 먼지와 함께 뭉쳐 흉터같이 커 보여요. (그는 옆에 있는 핀셋을 보여줬다) 가령 먼지가 얼굴부분에 있으면 이렇게 집어내죠.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이 있습니까?

어린 소년이었을 때 뭉크의 '절규'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었어요. 느낌이 아주 강했거든요. 그림을 공부하면서 제 그림과 비교해 봤어요. 내 방에 뭉크 그림을 걸어 둘 수 있을까. 난 못 걸어 둘 것 같아요. 꿈자리 사나워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추구하는 게 평안이고 행복이잖아요. 뭉크 그림이 경우에 따라서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그림을 그려서는 결코 스스로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림을 통해 저마다 행복감 또는 위안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충격적인 그림은 순간적으로 눈에 확 들어 올 수 있지만 글쎄..., 무심결에 지나쳤지만 계속 뒤돌아보게 하여 다시 그 그림 앞에 머물게 하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면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그림말입니다. 앞으로 지향한다면 그런 쪽의 그림을 그려보고 싶어요.

어떤 대상을 그리든지 간에. 전생에 그는 궁궐의 화원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잊혀 진 전생의 기억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들을 그만의 감각으로 다시 살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비워둔 여백, 그 사이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오래전 기억 속으로 마음의 여행을 떠나도 좋겠다.

글 조윤덕 기자 사진 정인권 기자

<금릉 김현철 화백은 1958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가헌 최완수 선생(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 실장)에게 진경시대 화풍을 배워 궁궐과 산천을 표현한 산수화, 전신을 담아낸 초상화 등을 그려 오고 있다. 최근에는 백두대간을 종주산행하여 진경을 그리는 '백두대간 진경'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다

(스크랩) 대기원시보 제246호(2009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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