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낙화암> 한지에 수묵담채 60x90cm 2005
(아래) <채석강> 한지에 수묵담채 36.5x56cm 2005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어렵다
-------------------------

  <낙화암>을 보자. 그림보다 여백이 많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것이 바로 '여백의 미'다. 화가는 화폭을 '채우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비우기'란 쉽지 않다. 가득 채우고 싶어 근질근질한 손과 마음을 다스리고, 이렇게 조금만 그려도 작품이 되겠다는 자신이 섰을 때 비로소 붓을 들었을 것이다.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과 수없이 그렸다 찢는 자기극복 과정을 거친 그림이다. 그래서 백마강의 물결조차 생략했다. '절제의 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백제의 패망과 함께 중국으로 끌려간 의자왕은 거처하던 곳의 산언덕에 올라 백마강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며 나 역시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본다. 잘못한 일도 많고 후회스러운 일고 많지만, 이미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이 그림처럼 맑고 담백하게 살아가야지!

같은 김현철 화백의 작품인 <채석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옛 그림의 그윽한 아취(雅趣)가 풍긴다. 왼쪽의 나무와 숲에서는 겸재 정선의 필치가 느껴지지만, 오른 쪽 여백에서는 김 화백 특유의 '여백의 미'가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겸재의 필치를 이어받은 '이 시대의 진경산수화'라고 생각한다.
  김 화백은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다음 곧바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간송미술관에 들어가 겸재 연구의 대가인 최완수 연구실장 밑에서 진경산수화의 문화적 배경을 공부하면서 겸재의 작품을 모사하는 작업을 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최완수 실장은 그에게 "이 시대의 진경산수화를 그려 세상에 알리라"면서 다시 화단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김 화백은 겸재나 단원의 진경산수화가 아닌, 자신의 진경산수화를 만드는 데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한계령에 가서 스케치를 완성하고도 곧바로 화폭에 옮기지 않았다. 바라본 진경을, 느낀 감흥을 가슴속에 묵히면서 걸러낼 부분을 가라앉혔다. 당연히 작품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는 옛 궁궐도의 기법을 연마하기 위해 <경복궁도>와 (수원 화성도>같은 대작을 그렸다. 그러나 단순한 옛 궁궐도의 복원이 아니라 자신이 새롭게 발전시킨 기법으로 재창조한 그림이다. 경기도미술관에 소장된 <화성전도>는 옛 문헌을 참고해 복원하면서 주요 건물 사이에 옛사람의 모습 대신 구름을 그렸다. 진경을 그리면서 구름으로 여백을 보여준 것이다.
  나는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채석강>을 보는 순간, 그가 드디어 이 시대의 진경산수화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작은 작품을 완성하는데 3년이 걸렸다고 했다. 김 화백은 전시회 개막일이 되어도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시를 하지 않는 화가다. 그가 얼마 전부터 북한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에 살 때, 5년 동안 거의 매주 북한산을 오르내렸다. 이제 그가 그린 북한산을 보고 싶다.

 이충렬('그림애호가로 가는 길' 저자) - 본문 222쪽~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