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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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in culture
2007년 6월호 77p~79p
포커스 - 이철주 展(5.17~6.10 금호미술관),  김현철 展(5.9~6.10 갤러리벨벳)

       
미디어마다 미술시장이 호황이라는 뉴스로 야단이다. 작가들은 말할 나위 없고, 배움의 길에 있는 학생들마저 작업이 시장에서 팔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진지한 탐색보다 어떻게 해야 콜렉터의 눈에 띄는 작품을 만들어낼지에 대한 생각이 우선되다보니 유행을 쫓아가기 쉽다. 작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작가들에게 있어 작품의 판매가 매우 중요한 것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지나친 시장에 대한 경도는 예술가로서 지녀야 될 가장 일차적인 질문, 즉 예술이 왜,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소홀하기 쉽다.
  우리가 한 작가의 예술세계에 경도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그 작가만의 심미적 셰계에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가치란 다름 아닌 삶에 대한 통찰력이다. 삶에 대한 통찰이 다른 누가 흉내낼 수 없는 개성에 의해 표현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시장의 유행을 쫓아가는 것은 작가의 자존심, 작가의 영혼을 파는 일이다.
  그래서 동양의 문인들은 진정한 예술이란 타인에게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남의 눈에 기준을 맞추는 것은 언제나 포장을 해야 한다. 팔기위해서는 잘 보여야 하고, 잘 보이기 위해서는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위장하거나, 과장하여야 한다. 예술과 진리는 적나라한 것이다. 예술은 진솔한 것이며 진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위기지학’이란 진솔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보이는 예술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화점 진열대의 상품 같은 요즘 전시에서 질박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는 두 전시가 눈에 띈다. 하나는 원로작가의 작품전으로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철주전>이며, 또 다른 하나는 갤러리벨벳에서 열리고 있는 김현철의 <그리지 않은 그림>전이다. 이 두 전시의 성격은 매우 판이하다. <이철주전>은 매우 현대적인 감각으로 수묵을 재해석하면서 작품에 동시대성을 부여하고 있고, <김현철전>은 필묵이 가지는 기본적 운필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대상에 기탁하는 방식으로 서술적 묘사가 돋보이는 전시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전시였지만, 시대적 유행을 쫓지 않는 작가의 주관적 의지가 드러난다는 점에서 공통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삶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필선

<이철주전>은 상당부분 현재 작업이 전시되었지만, 화단에 등단하던 초창기 1970년 이후의 인물화와 1980년대의 실경산수화, 그리고 1990년 이후의 비구상 작업 <우주로부터> 연작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회고전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40년 화업의 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시이기도 하다.
  “전통 한국화가 견지해 온 관념의 소재를 벗어나 생활세계의 사상(sache)을 작품화했다”는 미술평론가 김병수의 말처럼 그의 인물화는 당시 유행하던 현실에서 벗어나 그윽한 이상의 세계를 표현하던 미인도 같은 정적인 구성에서 탈피하여 삶의 현장에서 채집된 일상 세계를 모티프로 현실 생활에서 마주하는 삶의 순간을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과 형태 감각을 통하여 삶의 진정성을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소재의 혁신은 전통을 부정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전통의 핵심을 계승하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동양의 회화를 선의 예술이라고 하는 부분, 즉 필선을 통한 정감의 이입이라는 필과 획(劃)의 강조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골간으로 후기 비구상 작업으로까지 일관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러한 인물화에서 이룬 성과는 곧 1980년대의 실경산수로 이어진다. 그의 밝고 경쾌한 필선으로 발묵의 운치를 마음껏 발휘하며, 전통에 입각한 운필에서 나오는 획은 품격과 격조를 잘 갖춘 형상을 구성한다. 이는 그의 작업이 형식적으로 부단히 새로움을 추구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남종문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있어 남종문인화적인 품격과 격조의 가치란 곧 예술이 지향해야 할 ‘예술성’으로 그것은 곧 문(文)의 지극함, 언어를 벗어나 진정이 소통되는 인문의 최종 목표처럼 여겨진다.
  그의 이러한 작품세계가 동시대적 형식을 갖추게 되는 것은 1992년 금호미술관에서 열린 <이철주 초대전>으로, 이때 보여준 <우주로부터> 연작은 현실의 재현이나 현상의 모방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예술적 상상에 의한 심상의 표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 연작은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세계, 인식 이전의 세계로부터 인식의 세계로 진입하는 그 순간을 담고 있으며, 미분화의 상태로 남아 있던 태초의 우주에 대한 상상의 유희를 표현한다. 화면은 혼돈으로 상징될 만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어둠이 깔려있고, 무한한 깊이의 공간에서 거대한 불덩어리의 혜성이 하늘을 가른다.
  지상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풀들이 자유롭게 자라난다.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 태초의 우주에 작가의 인식이 더해지면서 상상의 우주는 그 모습을 드러낸다. 드디어 이 우주는 시작을 알린다. 시작을 알리는 효시는 작가의 붓이다. 화폭 위에 스치는 붓끝의 획에서 상상의 형상이 드러나며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일종의 감흥 상태에서 무작위의 붓질을 통한 무의식적인 행위를 통해 화면 위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 무한한 인식과 존재를 탄생시킨다.
  최근작 <치허(致虛)> 연작은 순수 조형만으로 유의미를 무의미화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몇 가지 글귀를 화면에 쓴 후,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분리하고, 그것을 다시 조형적인 조화와 율동에 의해 다시 조합하는 것이다. 화면에 임의의 글을 쓰고, 문자의 의미소가 살아나지 않도록 수많은 작은 사각형 조각으로 화면을 자른 뒤, 자른 조각의 변을 임의로 돌려 맞춰 마치 퍼즐의 짝을 찾듯 의도하니 않은 새로운 형상 언어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로써 화면에서 원래의 의미는 완전히 사라지고, 조형의 질서만으로 다시 구성된다. 화면은 이제 필선의 조합에 의한 우연의 효과만이 지배한다. 매우 유희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이러한 형식의 작업은 조형적인 장난, 순간의 위트가 발휘되는 조화, 이러한 유희로써의 작업은 ‘묵희’와 ‘자오’의 예술 구현의 방식을 실현한다. 스스로 즐기기 위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가장할 필요가 없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애써 포장할 필요가 없다. 도덕이나 이성적 가치판단이 멈춘 순수하게 심미적 쾌와 불쾌만 남은 그 세계, 원초적 감각만이 존재하는 그 적나라한 세계에서 삶의 진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지 않은 그림, 혹은 ‘발’로 그린 그림

김현철의 작품은 실경산수의 형식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 자신의 현재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형식적 허영과 수사적인 제스처가 없다. 그는 단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서사와 서정을 풀어간다. 단양팔경을 모두 그려 작품전에 내려고 했다는 작가의 계획은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으로 성취되지 못했다. 많이 알려진 곳이고 기존에 그려놓은 작품도 많으니 적당히 사진 좀 찍어 와서 작업실에서 재구성해 그려도 될 법하지만, 작가의 고지식함에 이번 전시에는 <단양사경>만 나왔다.
  그는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느끼지 않은 것을 표현하지 않는다.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가파른 산을 오르고 몇 년을 허비하며, 대상과의 상상을 통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서정을 옮긴다. 이 과정에서 또 그는 그 산하를 다녀갔던 선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묻는다. 도담삼봉(島潭三峯)을 가서보고 느끼고, 돌아와 다시 도담삼봉을 보고 그들과 대화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만의 도담삼봉을 그려낸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여리박빙(如履薄氷)의 심정으로 자신의 길을 간다.
  엄격한 임모와 사생을 통하여 형상과 감정 표현의 언어를 배우고, 그 언어에 자신의 감정을 싣는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의 형식이 아니라 진정이며 예술적 자각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번 작품전은 여백이라는 투명한 예술적 상상을 통하여 형상 너머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리지 않은 그림’이란 바로 이러한 여백을 염두에 두고 언급하는 것으로 그는 최소한의 필적으로 보다 많은 느낌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오늘날 관객에게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예술가가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이철주와 김현철, 이 두 작가의 전시를 통해 예술의 참된 가치에 대해 반성하게 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김백균(중앙대 예술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