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금릉(金陵) 김현철(58)씨는 지난 2014년 10월 어느 날,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그림 한 점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그 그림은 17~18세기 조선의 문인화가였던 공재(恭齋) 윤두서(1668~1715) 서거 300주년 기념전에 나온 그의 ‘자화상’이었다. 한국 회화사에서 비밀투성이 작품으로 꼽히는 명작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18세기 이전의 유일한 자화상으로 국보 제240호다. 정면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빛, 불꽃이 타오르듯 화폭 전면을 일렁이는 수염 등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얼굴이다.

이 자화상의 수수께끼는 여느 조선시대 초상화와 너무도 다른 파격의 형식에서 온다. 머리통만 달랑 그려 넣은 점, 서양화 기법을 연상시키는 채색과 음영 등 논란거리가 미술사학계의 단골 쟁점이었다. 도포 묘사 자국이 몇 군데 희미한 선묘로 남아있을 뿐, 화면 가장자리에서 급히 잘려버린 그림 구도며 장황(표구)도 하지 않은 낱장으로 해남 윤씨 집안에 내려온 점 등이 궁금증을 더했다.

조선시대 초상화가 그려진 과정을 보면 먼저 인물의 밑그림인 초본(草本)을 제작한 뒤, 여러 차례 수정과 보완을 거쳐 그 형상이 확정되면 이를 바탕으로 정본(正本)을 완성하는 것이 관례였다. 금릉은 윤두서의 자화상이 초본 형식으로 제작된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정본 과정까지 가지 못했다고 추측했다. 만약 정본 초상화가 그려졌다면 어떤 그림이었을까. 전통 초상화의 맥을 잇겠다는 소명을 지녀온 그는 자신이 이 해묵은 숙제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2015년 12월, 전남 해남 윤씨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을 찾아 종손(宗孫) 윤형식 옹에게 이 뜻을 전하면서 300여 년 시공을 잇는 작업이 시작됐다.

금릉은 공재가 그린 자화상을 보고 친구인 담헌(澹軒) 이하곤(1677~1724)이 칭찬하며 지은 글을 길라잡이로 삼았다.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四海)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로 시작하는 찬(贊)을 꼼꼼하게 해석하고 생각하는 나날 속에서 의관을 정제한 공재의 정면 반신상이 완성됐다. 이 찬시에 따르면 공재는 진실로 겸양의 기품을 갖춘 군자였다. 구레나룻과 수염은 바람에 날리듯 가볍게 그리면서 가려져있던 양 귀의 생김새를 종손의 귀를 사생해 보완했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얼굴 중심에서 기개 넘치는 맑은 눈동자가 반짝인다. 두 예술혼의 만남이 탄생시킨 또 하나의 걸작이다. 이 쇄신의 초상화는 27일부터 10월 3일까지 해남 녹우당 충헌각에서 열리는 ‘공재(恭齋), 녹우당에서 공재를 상상하다’전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