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의미는 보존이 아니라, 계승 발전시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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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 김현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재학 중이던 1980년대 중반 진경시대를 현대 우리나라 문예부흥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 가헌(嘉軒) 최완수의 뜻에 공감해 간송미술관에 입문했다. 그는 진경시대(숙종에서 정조까지)에 그려진 산수, 풍속, 인물화풍의 계승 발전에 뜻을 두고, 지필묵의 기초수련인 '임모(臨模)'는 물론 이 땅의 산천을 직접 답사하여 사생해온 작가다. 지난 10월 한벽원갤러리에서 <초상-그 전신(傳神)의 세계>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마치고, <궁궐-경복궁>을 주제로 또다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작가를 산본 작업실에서 만났다)


전통 초상화에 몰두하게 된 어떤 구체적인 계기가 있었나?

-  10여 년 전 전통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처음으로 산수화라는 장르를 선택했다. 중국, 한국을 통틀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인 산수화에는 동양회화의 모든 화론과 화법이 녹아 있기 때문이었다. 거듭된 임모와 사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조형언어를 익힐 수 있었으나 이럴 즈음 한 차례 시력장애를 겪게 되었다. 다행히 어느 정도 시력을 회복한 후 평소 섬세한 표현을 필요로 하는  전통적인 인물초상화에 대한 관심이 커 져 그에 대한 연구와 제작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지속적인 인물에 대한 관심과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금릉(金陵)이란 호를 짓게 된 까닭은?

-  ‘금릉(金陵)’은 스승이신 최완수 선생께서 지어주신 아호(雅號)이다. 호는 대개 자신과 연관된 지명이나 자신이 처한 환경 그리고 좋아하는 것 또는 이루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으로 짓게 되는데 ‘금릉’은 내가 성장한 곳인 김천 주변의 지명이다. (지금은 군이 시로 통합되어 사라진 지명이 되었다)
2000년 대구에 있는 공산갤러리 초대로 4번째 개인전을 앞둔 어느 날, 전통회화 수련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보시던 선생님께서 비로소 지어주셨다.

전통을 지킨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재료나 기법면에서 과거 방식에 충실하면서 오늘에 맞는 미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작품제작에 있어 재료와 기법을 소개해 달라.

-  내가 전통회화에 관심을 기울여 그것을 익혀온 것은 단지 전통을 지키고 보존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오늘과 내일을 가늠할 수 있겠기에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과거의 우수한 화법과 기법을 장르를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하다시피 공부해 온 것이다.
또한 지난 시대의 전통화법을 익혀 그것을 활용한다한들 내가 이미 과거의 사람이 아닌데 어찌 과거의 그림과 같은 미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가. 단지 그것을 익히는 수련과정에서는 과거의 방식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 다소 오늘날의 시대미감과 동떨어져 보일 수는 있겠으나, 장차 자신만의 개성적이며 독창적인 화법으로 발전하리라 확신한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배우지 않고 무엇을 이룬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가끔은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단지 개인의 역량 문제라 여겨진다. 전통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을 지키고 보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활용하여 계승 발전시키는데 있다.
우리의 전통회화에서 필히 익혀 활용한 만한 가치가 있는 화법이라면 모필(毛筆)에 의한 다양한 필법(筆法)과 궁중회화에서 널리 사용된 진채(眞彩)에 의한 채색법 등을 들 수 있다. 붓을 다루는 필법과 진채(석채)의 사용법은 오랜 시간의 수련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최근 개성과 창의성을 우선시 하는 성급한 회화학습 풍토로 인해 정작 익혀야 할 기본화법들이 소홀히 다루어지면서 현대화라는 미명하에 점차 잊혀져가고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산수나 화훼영모 등 다른 분야와 비교해 초상화(인물화)만의 매력이 있다면? 그리고 초상화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 가능한가?

-  이번 ‘초상-그 전신(傳神)의 세계’전(2008.10.15-25, 한벽원 갤러리)은 그 어느 전시회보다도 힘이 많이 든 전시회였다. 그것은 곧 사람의 초상(肖像)을 그렸기 때문이다.
‘세상에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귀신을 그리는 것이요,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은 사람을 그리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잘잘못을 가릴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귀신그림에 비해 사람의 초상은 무엇보다도 전신(傳神)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그리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전신이란 초상화를 그릴 때 외모의 닮음뿐만 아니라 내재된 정신성까지 그려내야 한다는 의미로 이는 곧 전통회화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전통회화 속의 어진, 공신상, 사대부상 등의 초상화는 당시 최고의 화원에 의해 최고의 기량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당대 최상의 다양한 화법과 기법을 두루 익힐 수 있으며 동시에 시대미감의 변모를 알 수 있게 한다. 비록 지금은 그러한 초상화가 사진이나 서양화법의 유화나 아크릴로 그려진 초상화로 대체되었으나 이는 그 전통이 올바로 계승되지 못했기에 그 자리를 내 준 것이라 여겨진다. 얇은 비단위에 배채법에 의한 투명한 듯 맑은 기운의 채색과 간결한 필묘법(筆描法)으로 그 전신(傳神)의 진정성을 드러낸 그림이라면 지금도 어느 누가 선호하지 않을 것인가. 장차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초상화를 제작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초상화를 제대로 보는 일도 쉽지 않다. 초상화를 볼 때 갖추어야할 감상법을 조언해 달라?

-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전통의 초상화는 단순히 그 대상의 닮음만을 쫓는 것은 아니다. 초상그림 한 점을 통하여 대상 인물의 지나 온 세월이며 인품, 직위 또는 향후 바람직한 인간상까지 드러나도록 그려진 것이다. 초상화를 감상할 때는 이와 같이 대상 인물의 전신(傳神)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구성형식, 자세, 의복, 채색, 필묘 등의 조형언어를 살펴 봐야한다. 또한 그림을 완성 짓는 족자, 액자 등의 장황(표구)까지 꼼꼼히 살펴봄으로써 제작자의 의도와 대상인물의 전신을 함께 느끼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책임감이 무척 클듯하다. 이렇게 쉽지 않은 길을 가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텐데, 지금껏 버틸 수 있는 저력은 무엇인가?

-  감히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지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 섭렵하며 익혀서 자신의 조형언어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지난 시간 이른바 현대적인 동양화를 한다고 뿌리고 붙이고 그으며 마치 끈 떨어진 연과 같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억지를 부리던 시절에 비하면, 느리게라도 한걸음씩 관심 있는 분야를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나아가는 지금이 너무나 안정적이며 편안하다. 이게 내 정서이며 성향인 듯하다. 

특히 요즘, TV나 영화에서 신윤복 신드롬이 일고 있다. 이런 세태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불만이 적지 않은 듯한데? 더불어 요즘 미술계가 돌아가는 양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  어째든 대중매체를 통해 잊혀 가던 전통회화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긍정적이다. 최근 서양화 일변도로 치닫기만 하는 미술계의 양상에 반해 비록 상당부분 허구일지라도 많은 이들이 우리 회화에 대해 관심을 드러낸 것은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는 듯하다.

간송미술관에 있으면서, 좋은 공부를 많이 했을듯하다. 간송미술관에 대해 한마디 부탁한다.

-  일찍이 최완수선생께서 전통을 공부하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서도 10년 만에야 그 공부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제작한 그림을 들고 간송미술관에 가서 선생님과 여러 동학(同學)들 앞에 그림을 펼쳐 놓곤 한다. 나이 50이 되어도 그림을 들고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또한 내게는 복이다. 늘 감사한다.

같은 길을 가는 후배 작가나 일반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관점의 차이일 수 있으나 그림은 결코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림은 보여 지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봐야만 하는 것이다. 소위 고전속의 명화라고 하는 작품은 단지 오래되어서 또는 유명하기 때문에 명화된 것이 아니다. 명화가 될 만한 가치를 스스로 지녔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한 공부와 관심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준희 기자 (월간미술 2008년 12월호 , 112~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