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개인전 서문)
'옛것으로부터 새로움을...'
롯데화랑(안양)
2007.11.15 - 11.21


큐레이터 三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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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현철을 만난 때는 본인이 미술관에서 서툰 큐레이터로서 일을 시작한지 그리 오래지 않은 때였다. 약간의 면식 있는 다른 작가의 방문 길에 우연히 동행해 함께 일산의 과수원 옆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 뒤 7년이란 시간은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니지만 요즘과 같은 초고속 시절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간 셈이다.
그 날의 첫 만남 뒤 작가 김현철은 큐레이터인 나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초보 큐레이터인 내게 큐레이터로서의 본질적인 보람과 기쁨을 알게 해준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작가에게 있어서 한 시대를 정리하는 중요한 전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본인에게 글을 부탁한 점에 대해서도 당혹감과 함께, 그동안의 감사한 마음을 다소나마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한다.

인생 三樂을 견주어 큐레이터에게도 三樂이 있다.
첫째는 좋은 작가를 만나는 즐거움.
둘째는 작가의 작업을 지켜보는 즐거움.
그리고 셋째는 작가의 전시를 하는 즐거움이다.

김현철은 내게 이 모든 것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작가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자면 김현철은 상상력과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는 아니다. 오히려 고답적이고, 보수적이며, 사람으로서는 한없이 너그러워 보이지만 어떤 부분은 적당히 느슨한 타협이라곤 없는 대쪽 같은 선비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작가다. 이런 작가와의 사이가 늘 한결같은 채로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요즘과 같은 시대의 속도에는 맞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천천히 가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시대이다. 다소 과장되고 허풍이 심한 상업적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느리고 천천히 자신의 호흡으로 본질을 찾아가는 작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분명 복된 일이다.

봄이 시작되기 직전 과수원 옆 작업실의 김현철은 한쪽 벽에는 길게 북한산 전경을 준비 하고 있었고, 한쪽에는 비단에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 날, 작업의 섬세함만큼이나 단정하게 정리 정돈 되어있는 작업실에서 나는 다소 낯선 김현철식 풍경화(?)를 보고 약간의 이질적인 설레임 같은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작가는 당시에 곽희의 조춘도와 겸재의 금강전도 같은 진경산수들을 임모했고 부여 낙화암, 합천 해인사, 안양 삼성산 등과 같은 우리 풍경을 겸재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작업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 북한산 도봉산을 야심차게 시작하려하고 있었고 또 한편으론 주변 사람들을 모델로 우리 전통 초상화기법을 연구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 날 내가 본 김현철의 작업은 당시의 화단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다소 특이한 작업이었다. 이 시대에도 임모의 방식이 예술 수업일 수 있는가? 라는 혼돈을 느끼기에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김현철에게 개인전을 제안했다.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는 몇 번의 사양과 설득 끝에 2002년 늦가을 과천 제비울미술관에서 <임모와 사생>展을 열수 있었다.

예술가의 개성과 창의력을 가장 큰 덕목으로 알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 임모와 사생이란 전시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 또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이후 우리 예술가들을 괴롭히고 혼란스럽게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름 아닌 예술정체성이었다. 우리 미술에 있어서 집단적으로 늘 혼란스러웠던 것은 낯설음과 새로움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었으며 자고나면 세계의 현대미술의 조류가 백화점의 상품처럼 하나씩 늘어나고 있었지만 가슴속의 공허함과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모래 항아리 같았다. 그러나 새로움이란 구태 한 것 위에 얹어져 있어야 비로소 새로울 수 있으며 어제 없는 오늘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과거를 부정한 채 현재를 이룰 수도 있단 말인가?

2002년 김현철의 <임모와 사생>展은 초보 큐레이터였던 내게 오히려 깊은 인상을 주었고, 우리미술의 오늘과 전통의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했다. 그 이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내내 우리미술의 전통과 오늘의 정신에 관한 문제는 줄곧 나의 화두가 되어 있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전통과는 무관해 보이는 현대 미술을 다루는 이 나라의 미술관에서 우리 전통에 집착하고 있는 다소 어정쩡한 나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하고 있다. 과수원 옆 작업실에서의 김현철과의 어색한 만남처럼 그 이후 여주와 이천 수유리와 평창동 등 예전의 앳된 김현철이 가졌던 폭발적인 열정으로 오늘도 붓에 먹을 적시고 있는 더 많은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이 시대와 시간을 공유해가고 있다.   

요즘도 나는 무심한 가운데에서도 김현철의 작업을 늘 세세하게 알고 있는 편이다. 얼마 전까지도 목수가 집을 짓듯이 차곡차곡 쌓아가며 경복궁을 그리고 있었고, 그 작품 안에서 절대시간 속의 인왕산 봉우리와 조선시대 경복궁 사이의 공간에 어떤 시간을 표현해야하는지를 두고 화가로서 끝 모를 깊은 사색을 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가까운 주변 지인들을 담아 온 초상화를 전시할 때가 되었지만 어떻게 상업화랑에 지인들의 초상을 걸 수 있는가 하는 다소 시대착오적인 조선시대 선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과로로 인해 약한 눈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업에 한 예술적인 자신감만은 점점 더 충만해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큐레이터의 즐거움 중 예술작품의 탄생과정, 즉 작가를 지켜보는 크나 큰 즐거움이다.
 
작가의 성장과 함께 덩달아 큐레이터도 성숙해져 간다.
이는 좋은 작가를 만났기 때문에 얻어진 불로소득 같은 기쁨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조금 더 세월이 흐른 후, 앞으로 보태질 작가의 작품과 함께 큐레이터의 생각을 보태 전시를 열고 관객들을 맞을 수 있는 크나큰 기쁨이 아직 남아있는 셈이다. 

2007.10.22
이 승 미 (북촌미술관 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