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의 전시장 가는 길] 제주에서 보내온 진경산수

금릉 김현철이 제주에서 120일 동안 지내면서 그린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다(한벽원갤러리, 2·29~3·8). 천과 한지 위에 먹과 채색이 어우러져 간결하고 담백하기 이를 데 없는 산수화 하나가 배어 나온다. 탁 트인 푸른 바다에 섬 하나가 떠 있는 장면이거나 먼 거리에서 바라본 산과 그 안에 위치한 작은 산사가 그려져 있다. 기존 제주도 풍경과는 무척 다르다. 제주도를 그린 그림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구도와 기법으로 성산일출봉이나 유채꽃밭, 용두암 등을 그야말로 ‘픽처레스크’하게 뽑아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면 이 그림은 그런 상투형과 관습적 시선에서 벗어나 있다. 무심하고 쓸쓸한 붓질이 정갈하게 얹혀지고 시원한 여백을 가득 살린 구도에서 광활한 바다에 떠 있는 제주도의 공간이 실감나게 묻어난다. 제주 풍광의 시원하고 활달한 기운과 청량한 공기의 내음이 ‘훅’하고 덤벼든다. 운치가 운무처럼 가득하다.

그림이란 단지 물상의 외형을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진정한 그림은, 그것이 풍경이라면 그 공간에서 느껴지고 맡아지고 감촉되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안겨준다. 옛사람들이 그린 산수화에는 그런 기운이 가득하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이 부감의 시선은 실제 가능하지 않은 상상의 시선이자 마음의 활력에 의해 포착된 장면일 것이다. 동양화에서 고정된 하나의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1시점이 아니라 다양한 시점이자 이동시점이다.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소실점과 수평선은 부재하다. 김현철의 그림은 다원적 시점과 이동시점을 보여준다. 세계는 떨림과 흔들림으로 어질하기에 그렇다.

이는 다름 아닌 실존의 시선이다. 이런 종합적인 시선이야말로 우리가 겸재의 진경산수에서 흔히 접하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겸재 정선을 본 삼아 진경산수를 체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늘의 진경을 그리고자 하지만 이를 제대로 구현한 작가를 접하기는 쉽지 않다. 나로서는 권기윤, 김천일 그리고 김현철 이 세 사람이 그런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김현철은 간송미술관의 연구원으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옛사람들 서화의 진수를 체득하고 이를 임모(臨摸)하며 연구한 끝에 자기식의 진경산수를 그려 나가고 있는 작가다. 그가 제주도에서 그려온 이 산수화는 한국회화의 전통이 동시대에 어떻게 환생되고 있는지, 산수화에서 접하는 그 운치와 기운이 무엇인지를 무척 매력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우리 진경의 한 자락을 안겨준다.

박영택(경기대 교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3022107565&code=9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