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황금도시 경주> 2차 워크샵

                --- 전통의 현대적 계승-전통을 넘어 바라보는 경주 ---

    ■ 일시 : 2006년 8월 4일 금요일 오후 6시~9시
    ■ 장소 : 북촌미술관
    ■ 참석자
              임대근(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 진경전, 2004, 한국미술 100년 전(2부), 2006, 기획)
              기혜경(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한ㆍ중 대가 장우성 이가염전, 2003,
                            소정 변관식전, 2006, 근대의 꿈-아이들의 초상 2006, 기획)
              김상철(전 공평갤러리 관장, 현 미술세계 주간)
              이승미(북촌미술관 부관장/ 아름다운 우리풍경, 2002, 사유와 생성_산수풍경의
                          시간  2004, 경기비경 2005, 천년의 황금도시 경주2006, 기획)
              정경미(북촌미술관 큐레이터)
              김현철(작가)
              김범석(작가)
              기록 정리 : 주진순ㆍ이현주(북촌미술관 큐레이터)

이승미 - 이번 좌담회는 그동안 진행된 <천년의 황금도시_경주展>에 대해 전통적 맥락에서 의미를 짚어보는 자리입니다. 오늘 참석하신 분들 중 덕수궁미술관 기혜경선생님은 2006년에 <변관식展>과 <근대의 꿈: 아이들의 초상展>등을 준비했었고, 임대근선생님은 <진경展>을 기획해서 전통적인 방식의 작업부터 젊은 작가들의 현대적인 설치 작업까지 진경의 범주에 넣어 현대 진경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큰 의미를 남겼습니다. 최근에는 한국미술 100년 전(2부)을 기획하셨습니다. 김상철 선생님은 14년 동안 공평아트센터를 통해 화단 전반이 전시하기 어려워하는 한국화를 홀로 보듬어 오다시피 하셨습니다.
이번 전시 참여 작가인 김현철선생님은 2002년 <임모와 사생展>을 통해 전통 회화의 수련과정인 임모를 몸소 실천해 전통적인 시각을 자신의 화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범석선생님은 전통적인 방법보다는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화의 방향성을 개척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면서 다양한 실험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미 - 오늘 이 자리는 ‘경주’라는 주제를 가진 <천년의 황금도시_경주展>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왜 갑자기 경주인지, 경주는 풍경인지 진경인지 전통인지 전통의 현대적인 계승인지 다각적으로 한번 이야기 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통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화와 서양화가 나누어지고 일각에서는 우리 전통에 대해서 강조, 혹은 강요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 부분이 젊은 작가들에게는 한편으로 커다란 짐이 된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화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젊은 작가들에게는 마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작업을 풀어가지 못하는 전제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근ㆍ현대 한국미술을 연구하고 계신 기혜경선생님께 ‘전통’에 대해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기혜경 -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먼저 메일로 받아 본 자료를 보고는 ‘또 다시 전통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 화두가 되는 시기, 전통에 대한 목마름 그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갖추지 못했다는 결핍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동양의 회화(중ㆍ일ㆍ한국화)의 근간은 서화동원론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근대기에 제도적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계기는 조선미술 전람회입니다. 저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와  한국화가 나누어지는 이분법적인 분리보다는 오히려 서와 화의 분리에서부터 동양적인 회화근간에 근본적인 균열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일제의 제국주의 정책, 흔히 말하는 일제의 문화이데올로기 정책을 통해서 20년대 말 30년대 초에 향토색 논쟁이 있었고, 30년대 후반부터 문장지를 중심으로 김용준의 수묵중심의 선비사상이 중요하게 논의되고 이러한 움직임이 해방이후 서울대 동양화과로 고스란히 이어지면서 채색은 왜색으로 동일시되고, 이후에 채색화는 한국화의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후 한국화에서 우리 전통은 조선시대 선비사상이나 수묵으로 밖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전통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끌어낸 것들은 60, 70년대, 80년대 국풍운동까지 뭔가 정통성이 결여된 시기에 전통이 슬그머니 망자처럼 되살아났고 전통을 끌어다 붙이는 현상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시대에 또다시 전통에 대한 논의가 되살아나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혜경 - 전통을 어찌 생각하느냐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전통이 리바이벌되는 것은 때때로 무엇인가 지켜내야 하는 것, 때로는 계승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야하는 것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데 그러면서 전통을 계승했다는 것은 당대의 요구에 기인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한 요구는 자기 정체성이 모호할 때 혹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합리화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나타납니다. 새로운 작업이나 예술 상황이 출현할 때 어떤 의미에서 새롭게 창출해 낸 것이 정체성이 모호한 상황에서 이를 합리화하거나 만족감을 얻고자 하는 시기에 전통을 되살려 화두로 회자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김상철 - 전통에 대한 논의는 인위적이라기보다는 시대의 필연적인 산물입니다. 첫째 당대의 상황이 믿음을 주지 못할 때, 두 번째 - 전혀 새로운 것이 출현했을 때 보수, 진보 같은 또 다른 기운으로 갈림길이 생겼을 때 그 중에 하나를 규정하는 방식으로 전통이 차용됩니다. 80년대를 생각하면 갑자기 변화한 상황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국풍 같은 전통 찾기 등의 자리가 커집니다. 누가 시작한 인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시대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혀 새로운 양상이 생겼는데 이것을 처리할 방법이 모호할 때 어느 순간부터 흐트러진 모습의 근본적인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아주 새로운 것이 생겨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저절로 필연적으로 전통을 끌어다 생각하게 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무척 복잡하고 난해해졌다는 것이죠.

임대근 - 우리에게는 늘 습관적으로 전통과 단절되었다는 느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급속한 현대화로 인해 전통의 적통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구에서는 전통에 대한 부담이라는 것이 없는데, 같은 아시아권인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도 우리는 매우 비중이 높은 것 같습니다. 저도 한국현대미술 100년 전 2부를 준비하면서 전시의 한 챕터의 주제가 전통이었는데 작가들이 전통에 대해 강박증에서 자유로워지기까지 50년은 걸렸다고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극단적인 아방가르드를 추구하는 작가들이 반드시 전통에서 뭔가를 끌어와야 안심을 합니다. 기하학적 추상 작가가 작업의 근거로 단청문양,  전통문양을 끌어오는 것에서 보듯 뭔가 필연적이라기보다는 부족하고 결여된 부분을 메우고 스스로 자족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김상철 - 교육현장에서는 늘 전통을 강조하고 있지만 모두가 다 다른 이야기를 한곤 합니다. 학교마다 얘기하는 전통도 다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1세대 교육자들이 교육을 할 때, 그 당시에는 전통이란 것이 매우 쓸모없다고 생각되어 배척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2세대, 3세대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전통에 대해 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전통이 뭔지 서로 합의가 안 되어 이 학교에서 이야기하는 전통이 다르고 저 학교 교수님이 말하는 전통이 달랐던 겁니다. 원래가 전통이 교육 속에서 잘 녹아 흘러왔다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우리처럼 일제 강점기, 6.25, 현대화 등의 격변을 겪어 전통이 단절되고 나니 새삼 스스로가 생각할 때 그 누구도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적자가 아니었던 것이죠. 그래서 전통을 이야기 하면서 그 중에서 가장 센 분 즉 겸재 할아버지를 모셔다가 업고 귀찮게 하는 것입니다. 유치하지만 한국 땅에서 이야기하는 전통이란 것의 실체는 허망하고 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혜경 - 중요한 지적입니다. 전통을 리바이벌할 때 정통성을 찾기 위해서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필요에 따라 어떤 때는 사대부의 수묵 문화를 가져오고 어떤 때는 겸재를 불러 진경문화를 가져오고 어떤 때는 민화에서 따오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들이대는 잣대가 다르고 내보이는 것이 달라서 혹자는 전통이라는 것이 민족이나 국가처럼 근대적인 산물로 보고 우리가 탈근대를 이야기하면서 없는 실체에 대해 왜 이야기를 해야 하느냐 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임대근 - 서구의 예를 들어 음악과 비교하면 음악의 고전으로 클래식이 있는데 그들에게는 클래식이라는 고전이 규범이 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고전은 당연히 읽고 공부하는 것이고 공부하면 할수록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인데 우리는 전통을 일종의 테크닉컬한 것으로 규정을 하니까 그 자체로 규범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경직되어서 거기에 맞추어서 생각하게 됩니다.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전통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구요.

김상철 - 그것이 기능으로 모양으로 보이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으로 전통을 규정지으니까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서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고려청자, 백자, 진경산수 등등 이렇게 나누다 보니까 그런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전통이란 것에 깊이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것으로 표현을 하고자 하는 것이죠. 전통에 대해 소화가 안 된 상태에서 막 풀어놓으니까 일부에게만 반향을 일으키고 공감을 못 얻는 것입니다. 또 하나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는 현실적으로 그 그림들이 놓을 데가 없어졌습니다. 쳐다보는 사람도 없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옭아매는 뭔가가 필요한데 그것이 전통이고 기득권인 셈입니다.

김범석 - 그림 그리는 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선생님들이 중국의 화론이나 이론을 알려줍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살 어린 학생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들을 말입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이고 내안에 내재된 어떤 것을 이끌어내 충실하게 그림에 표현하도록 하는 것이 쉽게 접근하는 것 같은데 마치 이론에서 떨어지면 낙오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이 큰 문제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고 후배들도 그런 생각이고요....

김상철 - 여담입니다만, 중국에서도 이른바 필묵이 소용이 있나 없나를 이야기하는 분위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거기는, 물론 사회주의 국가라 가능한 일이겠지만 몇 년 전 상해에서 전국화가대회를 열어 화가와 글 쓰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4박 5일 동안 먹이고 재우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라고 했습니다. 주제를 정해 세미나하고 각각의 주장들을 쭉 나열했습니다. 그리고는 분임토론을 하게 해서 다양한 주장들을 이야기하게 했는데 그것으로 뭔가 결론을 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다 모아 자료집을 냈습니다. 이것을 한 3, 4년 지속적인 프로그램으로 마련했습니다. 그 안에는 김범석선생 이야기대로 이 시대를 솔직히 살자는 얘기부터 이런 저런 주장할 만한 이야기들이 모두 나왔는데 그 주장들을 모두 기록해 놓았습니다. 결론을 내서 규범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생각들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자료로 근거로 만들어 둔 것인데 결과를 보면 전통에 대한 의식은 꼭 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동북아시아(전통을 이야기 하는 곳)의 공통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상철 - 중국 미술은 근본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두 번이나 입었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들어서자 화가들을 모두 청산했고 그 결과 대학에서 가르칠 선생이 없어서 소련에서 선생수입을 한 적도 있습니다. 문화가 짬뽕이 되어버린 것이죠. 게다가 문화대혁명이 있었고 그 상처가 회복되기도 전에 개방이 되면서 그 사의 빈틈을 서양의 가치들이 메우게 됩니다. 자본이 유입되면서 젊은이들에게는 돈 버는 것이 가장 큰 가치가 되어 그들도 옛 것과 노인들이 말하는 가치가 다 없어진 것입니다. 가르칠 사람도 없고 문화 전체가 다 비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위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술과 전통적 가치에 대해 덕망 있는 노학자들이 모여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야기하고 기록을 해 놓자 해서 책이 쓰여졌습니다. ‘중국예술정신’이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대만에서도 여섯 분의 노학자들이 모여 젊은이들을 위해 기록을 남겼습니다. ‘중국예술정신’은 이미 19쇄가 출판되었습니다.

김현철 - 이론이나 평론을 하시는 분들은 전통이 무엇이고 어찌해야 한다고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으나, 그림을 그리는 제게 있어서의 전통이란 그 자체를 익히고 공부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대학에 오기 전까지 동양화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에는 서양화를 하고 입학하여도 3학년 때 전공으로 동, 서양화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어 동양화를 선택한 후 대학, 대학원까지 마쳤습니다만 그림에 대한 확신이 서질 않았지요. 그 즈음 황창배 선생님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셨는데 그 분의 작업은 제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늘 수묵위주의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반해 황선생님은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 영향을 받아 뿌리고, 흘리고 하는 분방한 작업을 한 동안 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나이 5,60이 되어도 이렇듯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의 제 작업이라는 것이 일관성도 없었고 충동적으로 기분에 따라 매번 달라지니 기량이 축적되지도 않더군요. 당시 최완수 선생님께서 전통을 공부하라 하셨지만 그 때는 전통이란 것이 가슴에 와 닿지도 않았죠. 몇 년을 혼자 고민했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3년을 그냥 보냈어요. 그리고 어느 날 이제 뭔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전통회화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랐어요. 그러던 중 동양화의 여러 화목을 가만히 살펴보니 산수화는 시대를 이어가며 많은 작가들이 지역적인 특성에 따른 다양한 화법으로 끊임없이 그려졌더군요. 이를 익히면 뭔가가 잡힐 듯 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림을 익히는 방법으로 임모를 시작했습니다. 막상 임모를 시작했지만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재료에 대한 사용법도 산수그림이 제작되어가는 과정도 방법도 몰랐으니까요. 당시는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한참 지나서인데 대학원 다닐 때 남의 그림을 베껴 그린 적이 있었지만 선생님께 혼이 났었습니다. 왜 남의 그림을 베끼냐고....  사실은 그게 임모였는데 말입니다. 처음으로 임모한 작품은 도판에 작게 나와 있는 곽희의 산수화였습니다. 그림사이즈도 알 수 없어 인장의 크기로 미루어 짐작해 원촌 크기로 종이에 연필로 다 베꼈습니다. 이 후 비단에 그려진 그림이라 비슷한 비단을 구해 같은 그림을 3번이나 그렸는데 비단사용법을 잘 몰라 실패를 거듭한 겁니다. 이렇게 실패를 거듭한 것이 한편으론 응용력과 순발력을 키워주긴 했으나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이와 함께 야외에 나가 산수풍경을 사생하기 시작했죠. 요즘이야 찍어 온 사진을 보고 실내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가 중, 고등학생 때는 늘 밖으로 사생을 나가서 그림을 그리곤 했지요. 그것이 몸에 배여서인지 보다 쉽게 밖에 나가 수채화 같은 산수화를 그려 첫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최선생님께서 전통을 공부하라 하신지 꼭 10년 만의 일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옛 명화에는 그 속에 표현 질료의 문제, 조형의 문제 등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번 전시준비로 불국사를 그렸습니다. 지난 <경기비경 展>에서는 수원에 있는 화성을 그렸는데, 바로 그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박물관내에 있는 유물 중 일부 작품들을 모사하여 전시하려는 프로젝트가 있었습니다. 기회가 닿아 17세기 말 한시각이 그린 ‘북새선은도’와 고지도인 ‘동국대전도’를 모사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어떻게 그려야 할 지 막연했지만 박물관내에서 원본을 대면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제작과정이 어느 정도 보이더군요. 특히 이들 그림의 많은 부분이 진채로 채색되어 있어 이를 통해 진채화의 진면목을 익힐 수 있겠다는 생각에 2년 가까이에 걸쳐 모사작업을 했습니다. 작은 도판을 보고도 모사연구를 하는데 작품의 진본을 직접 볼 수 있는 모사작업은 제게 더없는 좋은 기회였고 또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이를 끝낼 즈음에 수원의 화성을 만나게 되어 모사작업을 하면서 익힌 화법을 응용하여 ‘화성전도’를 그린 것입니다. 이번에도 ‘북새선은도’ 그리고 화성을 그린 ‘화성전도’ 등을 참고하여 불국사를 그려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옛 그림 속에 구사된 화법이나 방식이 요즈음 감각과는 분명 다른 면이 있지만 지금도 이를 얼마든지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단순히 답습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익혀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또 다른 새로운 전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승미 - 저는 김현철 선생님이 임모하는 과정에서 선생님 작품을 만났고 임모와 사생이라는 제목의 창작지원展을 기획했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전통을 공부하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저는 선생님과 같은 그림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곽희와 겸재의 그림처럼 작정하고 임모한 작품 이외에 임모과정을 통해서 그려서도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대다수의 화가들이 처음부터 자신만의 독창성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다 다른 작품들을 보고 생각하고 연습하고 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찾아가는 것이죠. 즉 공부하는 과정이 쌓여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이루어 가는 것 같습니다. 다만 화성전도나 불국사를 볼 때 이것이 조선시대 그림인지 2006년에 그린 그림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현대적으로 사실성이 바탕이 된다면 어떤 그림일까 하는 문제는 남겠지요.

김현철 - 제가 그림을 그릴 때 조형적 처리나 공간적 구성에 있어 막히는 부분들이 있으면 그때마다 겸재나 단원의 화첩을 펼쳐놓고 유심히 살펴보는데 언제나 그 속에서 답을 찾곤 합니다.
‘불국서색’을 그릴 때 불국사와 함께 토함산을 한 화면에 넣었는데 저 위치에서는 실제 토함산 너머에 있는 석굴암이 보이질 않습니다. 불국사에서 토함산 석굴암까지 걸어서 답사를 한 후 한 화면에 모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시점에 의한 화면 구성법은 겸재나 단원의 그림 등 옛 고전 작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세하게 그림을 살펴보면 실제와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석굴암도 그렇고 토함산의 크기에 비하면 불국사는 지나치게 크게 그려진 것이죠. 하지만 그 사이에 운무를 그려 넣음으로써 그 불균형을 해결했고, 운무의 또 다른 의미로 이 그림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동해로부터 맑은 기운이 토함산을 넘어 불국사로 흘러 들어오게 함으로써 불국토라는 신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 것입니다.
저는 겸재가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인데 겸재는 현장에서 직접 모필을 들어 사생을 하지 않은 듯합니다. 이에 반해 김홍도는 현장에서 직접 사생을 한 듯 성실하게 그려진 그림이 있습니다. 겸재의 대단히 과장된 그림은 현장을 두루 답사는 했으나 현장에서 바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돌아와서 기억과 감동에 의한 조형적 재구성에 의해 그려진 그림일 거라는 겁니다. 기억에 의한 그림은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그려질 수 있고 이상화시킬 수도 있지요. 그래서 겸재의 그림이 어느 누구의 그림보다도 더 현대적으로 느껴지지 않나 싶습니다. 저 또한 그러한 점을 많이 참고하여 제작했습니다. 전통의 화법을 단지 과거의 낡은 화법으로 보기보다는 지금 어떻게 그것을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할 수 있겠죠.

김상철 - 전통의 소중함, 전통은 치워버려야 할 어떤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기에 몰입해있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전통에 대한 강박관념 이전의 새로운 것을 이전의 기준이나 틀에 대비시켜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전통에 대한 이해 수용에 있어서의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전통의 최첨단 끝자락이 바로 현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현철 - 옛 그림의 큰 가치는 현재에도 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전의 명작이 왜 좋은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 시대를 초월해 명작이라 하는지... 그림을 익히고 공부를 하려면 우선 좋은 그림들을 많이 봐야 합니다. 요리를 잘하려면 요리학원엘 먼저 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보고 좋은 음식에 대한 맛의 기준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고전작품이나 명화 등에서 보여 지는 시대를 뛰어넘어 인정받는 미의 기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봐야 합니다.

이승미 - 김홍도와 겸재이야기를 하셨는데 현장사생을 하는 것과 (요즘은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사진을 찍어서 그리는 것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권기윤 선생의 경우를 예를 들면 선생님은 반드시 현장사생을 고집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처음엔 사진을 찍어서 보고 그리는 작업들을 했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 후에는 꼭 현장사생을 하신다고 합니다. 저희가 전시 기획을 하면서 작품 사이즈를 주문을 하지 않습니까? 100호 기준으로.... 50호 기준으로 몇 점... 등등 어찌 보면 참 우스운 주문이지만 전시장 사정 등을 고려해서 그렇게 말씀드리곤 하는데 권기윤선생님은 “난 현장에서 그려야 하기 때문에 100호는 못 그린다..” 게다가 그림 크기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날 현장의 기분에 맞는 종이 크기가 작품 크기라구요. 그러면서 덧붙이시는 말씀이 ‘작아도 100호짜리 그림 옆에 두어도 뒤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작품을 걸어보면 그런 것도 같습니다. 큰 그림 옆에 작은 그림이 걸려 있는데도 화려한 그림 옆에 있어도 결코 그 작품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 거죠. 선도 아끼고 아껴서 몇 개 안 그린 단아한 그림이 말입니다. 파워풀한 힘이 나오는 것을 보고 현장에서의 힘, 마음으로 받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승미 - 이 말씀을 드린 것은 김범석선생님께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김범석선생님과는 이번이 3번째 전시입니다. <산수풍경의 시간展> <가고픈_경기비경展> 그리고 이번 전시입니다. 지난 3년을 지켜보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선생님의 그림이 뭔가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3년 전에도 동네 마을풍경을 그렸고 지금도 풍경을 담았는데 말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짚이는 데가 있습니다만 작가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범석 - 그림은 그리면 그릴수록 달라집니다. 책을 보고 얻는 화론 같은 것보다 현장에서 직접 느낀 체험의 힘에 중요성을 많이 느낍니다. 현장에서 직접 사생하는 힘은 다릅니다. 이유는 현장에서 형체를 보면서 공기, 구름, 빛, 바람 등의 요소들이 상상을 자극하여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 것들이 영향을 줍니다. <오래된 미래_남산별곡>은 실제 현장에서 부딪히는 것의 중요성이 느껴진 것입니다.

이승미 - 원로작가 이열모, 김동수, 정하경 선생님과 함께 답사를 갔었습니다. 그 답사 과정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력이라는 것은 절대로 어느 날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서울에서 새벽에 출발해 경주에 12시 전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시간을 아끼자며 포석정에 갔는데 선생님들께서는 한자리에 앉아서 완성할 때까지 그림을 그리시더군요. 연필로 살짝 밑그림을 그리고 위에 먹 선을 입히고 수정하는 법도 별로 없이 말입니다. 저는 평소에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옛날 우리나라 작가들, 지금처럼 차도 없고 말도 타기 어려운 시절에 금강산까지 어떻게 걸어서 갔는지, 그림도구는 어떻게 이고 지고 갔을지, 더구나 지필묵 다루기가 장난이 아닌데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이번에 그 의문을 풀었습니다. 선생님들의 가방은 요술가방이었어요. 맥가이버 가방이랄까요. 가방 안에 필요한 온갖 도구가 다 있었습니다.  둘째 날은 삼릉계곡(마애불)으로 남산을 올라갔는데 원로선생님들은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끄떡없이 쉬는 시간도 아깝다며 산에 올라가자마자 자리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작가들이 금강산을 찾아 순례를 떠나는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또 절대로 세상에 그냥 되는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했습니다. 제작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을 때 현장사생은 아주 사실적이고 정직한 그림이었습니다.

임대근 - 옛날에는 시간의 개념이 좀 더뎌서 모두가 긴 기다림을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 작가들은 30대 후반 혹은 40대에는 결론이 나야 작가로서 계속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불과 한세대 전만해도 작가들은 말년에 가야 결론이 나곤 했습니다. 예를 들면 박생광같은 작가도 돌아가시기 5년 내에 모든 작품이 다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작가들이 그렇게 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언제 전통을 체득해서 언제 자신의 작업으로 풀어내느냐는 것이죠.

김현철 - 전통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스터한 사람도 있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습득한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처음부터 전통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길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자가 반드시 차에 대한 모든 기계장치를 잘 알아야만 운전을 잘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전통이라는 것에 대한 가치도 각자의 역량과 관심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통에 대한 접근방식 역시 다양하게 열어 놓아야 합니다. 전통에 대한 논의가 거론될 때마다 전통에 대한 규정을 만들려 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김상철 - 우리가 말하는 전통이라는 것이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한 것 아니겠어요? 이제는 전통의 가변성에 대해 너그러워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대표음식 김치에 대해 생각해보면 신라시대 겨울에 저장해서 먹기 위해 소금에 절인 배추가 최초의 김치 ‘딤채’랍니다. 상당 기간 ‘딤채’를 먹었겠죠.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들어오니까 고춧가루를 넣어서 붉게 만든 것이 오늘의 김치입니다. 고춧가루도 일본과 중국에 다 전해졌지만 정착된 곳은 우리밖에 없죠. 김치의 종류도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은 신라의 ‘딤채’와는 정말 달라졌죠. 그렇지만 그 많은 김치의 종류를 세지 않고 우리는 ‘김치’라고 부릅니다. 김치의 양상은 변했어도 소금에 절인 야채로서의 본질(덕목)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고기에 고춧가루를 버무린다고 해서 김치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전통이라 말하는 것에도 본질적으로 지켜야할 덕목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줄기들만 설정하고 나머지 항목들은 당대의 혹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새로운 것들이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의 내용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전통에 문제가 있다면 문제점을 수정하고 새로운 것들을 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통을 중시한다면 그것에 가치,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좀 더 그것을 강조하고 다듬어서 적용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미 - 이번에 경주를 작업하는데 전통적인 실경만을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산수를 그리는 작가는 실경이고, 서양화를 하는 작가는 풍경화고 하는 구분은 맞지 않는다고도 생각하고 또 경주를 풍경으로만 풀어갈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풍경이 아닌 다른 작업을 하시는 몇 분에게 의뢰를 했었는데 이종구선생님만 승낙하셨습니다. 이종구선생님은 권해드린 몇 가지 안에서 본인이 처음부터 석굴암을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석굴암 안에 있는 석상을 다 그려주실 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사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무척 궁금했었어요. 그런데 아까 보신대로 정말 뜻밖의 작품이었습니다. 
‘경주’는 현재 행정구역인 경주시로서의 지역성이 아니라, 역사 그리고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경주 아닌가 생각했고 거기에 2천년의 시간을 어떻게 상을 차려서 보여줄 수 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숙제였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경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분들도 많이 만났고 경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역적 경주가 아니라 역사문화로 경주를 어떻게 표현할지가 사실 고민이었습니다. 이윤기 선생님은 경주를 ‘신화’로 보고 계시더라구요. 저도 이번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에 비해 한편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신라는 우리 민족의 신화의 일부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기혜경 - <경주展>을 하신다고 할 때 그런가 보다하고, 공문을 보고 오늘 작품을 보면서 이게 전통이라는 것과 맞물리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 1년 동안 뉴욕에 가 있었는데 붐처럼 아시아 미술이 뜨면서 중국과 인도 미술전시가 많았습니다. 인도미술을 볼 때마다 이 사람들은 전통이라는 무게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주가 천년의 고도라고 이야기 하는데 천 년 전에 경주가 있었다면 현재의 경주도 있습니다. 이 둘의 만남이 있어야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그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경주가 가진 과거의 무게가 너무 크고 무거운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에 반해서 현실이 너무 가볍게 처리되는 것이 아닌지요? 현재의 삶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요?

이승미 - 처음부터 현재에 대한 생각을 못했죠. 경주를 막연히 밖의 사람들이 생각할 때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도시이고, 천년의 고도로 생각했지, 현재를 살아가는 경주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김상철 - 실경이 가지는 한계가 그것이 아닐까요? 모양보고 모양그리기를 해서 천년을 그리기가 쉽지 않거든요. 모양에 강제된다고 할까요? 전통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면 처음부터 진경의 개념을 끌어다가 자유분방하게 그리던지.

김상철 - 화가들은 돈이 없는데도 현대건설도 못하는 일을 합니다. 산을 옮기고 없던 산도 만들어 버리고 가까이 있는 것을 멀리 밀어버리기도 합니다. 아까 김현철 선생님처럼 토함산을 불국사 옆으로 끌어다 놓고 하는 것이, 예전에 겸재도 세검정 옆에 북한산을 옮기기도 했지 않습니까? 경치보고 경치 그리는 것 경주보고 경주 그리는 것이 되어버리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 뒤에 천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 했을 때는 또 다른 소재를 택하기 위해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막 그리기를 하던지. 100년 뒤 1000년 뒤의 경주를 그린다든지 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승미 - 또 하나의 소재주의라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정말 이상한 것은 경주를 작업하겠다고 생각하고 나서 경주그림을 찾아보려고 했었는데 예전에도 경주를 그린 것은 없습니다. 진경시대에도 겸재의 골굴암, 그리고 강세황의 경주 그 이외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재주의로 빠져도 좋지만. 어떻든지 우리 풍경, 산천이 다 기록으로 남아서 작품으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실현시키고 싶습니다.

김현철 - 이번 전시 주제가 ‘천년의 황금도시’인 경주이지만 참여하는 작가 모두가 현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 과거 지향적인 의미로의 전통이란 말은 빠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승미 - 오늘의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전통에서 자유로워지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작업을 했으니까 좀 자유롭게 바라봐주자.’는 것입니다.

김범석 - 저는 나름대로 쉽게 스스로 정리를 한 것이 결국은 소통에 관한 문제이고, ‘인정을 하자. 받아들이고 인정을 하자’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가지고 있던 아집이나 가치는 있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고, ‘저 분은 저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나는 이런 시각으로 받아보는구나’ 하고, ‘작업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서 그림으로 이야기를 해야지하고 인정하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김상철 - ‘역사는 뭔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데 모르는 사람은 철저하게 응징한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가 길을 가다보면 방향을 잃고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처음 가는 길이니까요. 그럴 때마다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로 내려올 때 전통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시행착오를 덜 겪고 실수를 줄이라는 의미죠. 작가들은 제일 먼저 압니다. 전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다면 길을 잃었을 때 바로 돌아가서 확인해 볼 여지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을 하나만 만들어 놓고, 이것이 전통이니 이곳으로만 들어가라고 하면 어렵지 않습니까? 여러 개의 문을 만들어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해야죠. 지금의 경주를 기록해 놓는 것도 문명을 축적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김상철 - 저것에 너머를 보십시오. 산도 키우고, 산도 줄이고 하는 것 심원이니 고원이니 하는 것들이 심리 공간이거든요. 뒷산이 앞으로 오고 앞산이 뒤로 가고 천년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하게 되면 경주는 무한히 큰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년 뒤의 경주를 그려 보면 어떨까요?

김현철 - 경주는 수학여행지로서의 기억이 너무 강합니다. 사진을 보면 곳곳이 기억나지만 금방 잊어버리는 관광지로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통하여 많은 작가들이 저마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경주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이승미 - 누구나 다 그 생각을 하네요. 저도 그동안 경주를 관광지로만 생각했지 문화적 대상으로 보기는 이번에 처음이었습니다. 너무 어렸을 때 감당하기에 적절치 않은 대상이죠. 역사의식이라는 것이 교과서에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과 이어질 때가 되어야하는 것이죠. 예술을 이해하는 것도 그렇지 않나요? 어린 아이들에게는 같은 예술 작품이라도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하기 마련이죠

기혜경 - 이 좌담을 더 일찍 했으면, 이것을 작품에 반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흔히 실경을 그린 한국화 같이 그냥 경주=경주를 그리는 것 보다 다양한, 아까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너나없이 경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재미난 시각들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작업들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임대근 - 예전에 경주를 그린 그림이 정말 그렇게 없습니까?

이승미, 기혜경 - 없습니다.

김현철 - 고려 이후로 경주는 변방이니까요

기혜경 - 불교유적이니까 유실되었을 것입니다.

이승미 - 고려는 고려와 경주의 중간지점에 안동을 만들어 놓고, 경주를 누르려고 했고, 어떻든 경주는 몰락한 나라의 지나치게 오래된 수도였기 때문에 경주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일부러 도외시 되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일제시대 이후 복원되기 전까지 경주는 거의 잊혀져 모두 다 허물어져 있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시간은 좀 부족하지만 풍경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풍경을 한국화로 보면 사실은 훨씬 더 잘해요. 선수층도 두텁고 그런데 서양화에서 풍경화를 그린다고 하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풍경을 담는 것은 영원한 고전 아닙니까?

기혜경 - 잘못된 것은 없죠. 풍경을 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풍경 속에 무엇을 담아내는가가 문제입니다. 박대성선생님처럼 작품 속에 특별한 무엇인가 담겨져 있는 것, 그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김상철 - 실은 그동안 인상파 이후 대단한 풍경화가가 없습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부류가 그동안 잘못해 왔던 것을 응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김범석 - 그래도 새로운 싹은 돋아나는 것 같습니다.

이승미 - 민정기, 강요배 선생님과 같은 분들의 풍경은 또 다른 힘을 가지고 있고 그런 식으로 자기 시각과 자기 생각을 담는다면... 누가 이 두 분의 작품을 한국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임대근 - 좋은 풍경화 작업을 많이 못 봐서 그렇습니다. 고만고만한 풍경에 식상해 왔기 때문이지 풍경화라고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승미 - 장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오늘의 미술의 길을 함께 가는 작가고 큐레이터고 이론가이기 때문에 그동안 자꾸만 우리 뒤를 잡고 있던 실체가 뭔지도 잘 모르는 무게를 털어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좀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가는 것, 전통에 대한 자유로운 시각을 가지는 것 그것이 곧 우리의 전통이고 우리 뒤에 오는 젊은 친구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의 이 자리가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