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전, 자화상을 그린 공재 윤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본의 초상을 그리지 않았다. 이에 2016년 한 후학이 초본의 자화상을 근거로 정본 초상화를 그렸다)
[공재 윤두서 초상화 제작 배경]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대상 인물의 밑그림인 초본(草本 밑그림)을 제작한다. 미완성 초본을 여러 차례 수정, 보완한 후 그 형상이 확정되면 이를 바탕으로 정본(正本) 초상화를 그렸다. 이 때 초본은 대개 형태의 수정이 가능하도록 종이에 기름을 먹인 유지(油紙 기름종이)에 그려졌으며 정본은 반투명한 성질을 가진 비단에 배채(背彩)와 전채(前彩)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 그려진 공재 윤두서(1668~1715) <자화상>은 종이에 먹과 엷은 색으로 그려진 세로 38.5cm 가로 20.5cm 크기의 그림이다. 의복인 도포는 본래 간략한 선으로 묘사되었으나 현재에는 지워져 몇 군데 희미한 목탄 선묘 자국만 남아 있을 뿐, 그 실체는 적외선 촬영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머리에 쓴 탕건을 비롯해 화면 좌, 우, 하단의 3변 바깥까지 이어졌음직한 도포의 형태가 화면 가장자리에서 급히 잘려 있는 그림의 구도하며 장황(표구)도 하지 않은 채 낱장으로 서책들 사이에 끼어 후대에 전해졌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보아 윤두서가 그린<자화상>은 초본 형식으로 그려졌으며 그 어떤 이유로 정본 초상화로는 완성되지 못한 것이라 짐작된다. (녹우당 윤형식 종손의 증언에 의하면 젊어서 서책사이에 끼워진 그림을 해남의 표구점에서 지금과 같이 액자로 꾸몄다한다)
지난 2014년 가을, 공재 서거 300주년 기념전이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공재와 관련된 여러 유물들이 진열된 전시장에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또 다시 마주 했다. ‘공재는 왜 자화상 초본을 그린 후 이어 정본의 초상을 그리지 않았을까?’, ‘당시 초본을 바탕으로 정본 초상을 그렸다면 어떤 그림일까?’ 라는 의문이 새삼 들었다. 공재가 자화상을 그렸을 전후 친구인 심득경(1673~1710)의 전신 초상을 비단에 그렸기에 그 궁금증은 더했다. 이런 생각들은 그의 서거 300년이 지나 한 후학이 공재 초상화를 그리게 한 실마리가 되었다. 이에 2015년 12월, 해남 녹우당을 방문해 해남윤씨 종손가에 그 뜻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초상화는 무엇보다 대상 인물과 닮아야 하기에 ‘전신(傳神)’을 중요하게 여긴다. 전신이란 초상화를 그릴 때 외모의 형사(形似)뿐만 아니라 내재된 정신성까지 사생해 낸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윤두서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생전의 모습과 정신세계를 엿볼 필요가 있었다. 객체화한 자신을 찬찬히 응시하며 세밀한 묘사력으로 표현한 자화상은 무엇보다 사실성이 뛰어나 윤두서의 용모를 헤아리기에 충분했으며 적외선 촬영에 의해 드러난 도포의 윤곽선 또한 그의 체격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게다가 당시 공재가 그린 자화상을 보고 친구인 담헌 이하곤(1677~1724)이 이를 칭찬하며 지은 글 ‘윤호언자사소진찬(尹孝彦自寫小眞贊)’ 에는 그의 외모의 특징과 인품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다. 공재 윤두서의 외모의 특징인 긴 수염과 붉고 윤기있는 피부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진실로 겸양의 기품을 갖춘 군자였다는 내면의 성품까지 찬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윤두서가 자신을 보고 그린 자화상의 진적(眞蹟)과 그의 친구 이하곤이 그 자화상을 보고 지은 찬시 등은 공재 윤두서의 초상화를 그리려는 후세의 화가에게 이보다 더 귀한 자료가 없겠기에 이를 초상화 제작을 위한 근거로 삼았다.
尹孝彦自寫小眞贊 (윤효언이 스스로 그린 작은 초상화를 칭찬하다)
* ‘효언’은 윤두서의 자(字)
以不滿六尺之身 (6척도 안되는 몸으로)
有超越四海之志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飄長髥而顔如渥丹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은 윤택하고 붉구나)
望之者疑其爲羽人劍士 (그림을 보는 이는 그가 신선이나 검객으로 의심하지만)
而其恂恂退讓之風 (그 진실로 물러나고 양보하는 기품은)
蓋亦無愧乎篤行之君子 (대체로 인정 많고 성실한 군자로서 또한 부끄럼이 없구나)
余嘗評之曰風流似顧玉山 (내가 일찍이 그를 평해 말하기를 풍류는 옥산 고덕희 같고)
絶藝類趙承旨 (빼어난 기예는 승지 조맹부와 같으니)
苟欲識其人於千載之下者 (진실로 천년 후라도 그를 알고자하는 자는)
又不必求諸粉墨之肖似 (다시 채색과 먹으로 그린 초상화에서 닮음을 찾을 필요 없으리)
<출처 : 이하곤의 두타초>
<윤두서 자화상>은 국보 제240호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기억하고 있다. 정면을 응시한 강렬한 눈빛과 무성한 수염은 일찍이 이하곤이 염려했던 바와 같이 도사나 검객이 아닌가 여길 만큼 후세 사람들은 간혹 자화상 속의 윤두서를 사납고 무서운 인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화상 진적인 원본 그림에서는 영인본(사진 이미지) 그림과 달리 그윽한 눈매를 위시해 반듯한 용모에서 군자로서의 덕을 갖춘 보다 온화한 기품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개의 영인본은 사진촬영을 한 인쇄물이므로 원화의 섬세함에는 못 미치기에 이렇듯 이미지가 왜곡, 과장되어 전달될 수 있다.
윤두서 초상화는 <윤두서 자화상> 보다 크기를 크게 하여 의관을 갖춘 정면반신상으로 다음과 같이 그렸다. 용모 중 눈, 코, 입 그리고 수염의 형태는 <윤두서 자화상>에 표현된 모양을 옮겨 사생했으나 세부적 표현은 좀 더 현실감 있게 고쳐 그렸다. 특히 구렛나루에 가려져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었던 양쪽 귀 모양은 해남윤씨 종손인 윤형식 옹의 귀를 사생해 보완했다. <윤두서 자화상>에는 머리에 쓴 탕건의 상부가 잘려 있으나 제작할 정본 초상화에는 조선 중엽 사대부들이 집안에서 착용했던 동파관의 온전한 모양을 <심주 초상>에서 참조해 그렸다. 이는 공재 윤두서가 <심득경 초상>과 <소동파 초상> 등에서 동파관을 쓴 모습으로 인물들을 그렸기에 공재도 평상시 동파관을 착용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공수자세의 형태는 적외선 촬영으로 드러난 도포의 지워진 어깨 의습선을 연장해 완성했다. 이와 같이 공재가 그린 자화상과 그의 다른 초상그림들을 면밀히 살펴 본 후 화가의 상상력을 보태어 정본 초상화 제작을 위한 밑그림을 완성했다. 이어 준비된 비단에 선으로 형태를 잡고 배채(背彩)와 전채(前彩)기법으로 채색을 순차적으로 올렸다. 앞서 이하곤이 찬시에서 말한 ‘표장염이안여악단 飄長髥而顔如渥丹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은 윤택하고 붉구나)’을 참고하여 구렛나루와 수염은 바람에 날리 듯 가볍게 그렸고, 피부색은 적갈색으로 섬세한 붓질을 거듭해 윤택한 붉은 기운이 얼굴에 감돌게 표현했다. 도포는 간략한 담묵의 필선과 엷은 흰색으로 채색해 <윤두서 자화상>에서 보이 듯, 화폭에서 상대적으로 얼굴이 두드러지도록 표현했다. 특히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있어 가장 중요한 표현인 눈동자는 윤두서의 기개가 한껏 표출되도록 맑고 강렬하게 그렸다. 이렇듯 그림의 형상을 완성한 후 화면 상단에는 화제와 함께 본 초상화 제작의 근거가 된 이하곤의 찬시를 함께 적어 밝혔다.
2016.06
김현철(화가, 간송미술관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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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畫題)는 아래와 같다.
(화면 우측과 상단)
恭齋尹先生斗緖遺眞 (공재윤선생두서유진)
尹孝彦自寫小眞贊 (윤효언자사소진찬)
以不滿六尺之身 (이불만육척지신)
有超越四海之志 (유초월사해지지)
飄長髮而顔如渥丹 髥 (표장발이안여악단 염) * 髮자를 髥자로 정정
望之者疑其爲羽人劍士 (망지자의기위우인검사)
而其恂恂退讓之風 (이기순순퇴양지풍)
蓋亦無愧乎篤行之君子 (개역무괴호독행지군자)
余嘗評之曰風流似顧玉山 (여상평지왈풍류사고옥산)
絶藝類趙承旨 (절예류조승지)
苟欲識其人於千載之下者 (구욕식기인어천재지하자)
又不必求諸粉墨之肖似 (우불필구제분묵지초사)해
李夏坤 讚 (이하곤 찬)
(화면 좌측 아래)
丙申仲夏後學金賢哲謹寫 (병신중하후학김현철근사)
(낙관)
金 (김)
賢哲 (현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