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바다를 담은 진경(眞景), 금릉(金陵) 김현철(金賢哲)의 그림 - 도병훈 (facebook / 2018. 10. 09)


조선 후기의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고송유수관 이인문, 조선 말기의 북산 김수철 등이 그린 산수화를 들여다보면 공통적 요소가 있다. 아득히 청명한 가을 하늘아래 눈부신 햇살 속 사물과 풍경을 이루는 필촉(筆觸)의 선명성과 더불어 작은 화폭조차 여유롭고도 넉넉하게 만드는, 정갈하면서도 다소는 어긋남과 흐트러짐이 있는 점 말이다. 이런 특성이야말로 중국의 전통산수화나 일본화와는 확연히 다른 전통회화의 특성으로 볼 수 있으니, 무엇보다 뚜렷한 사계의 변화, 이 땅 특유의 지세(地勢)와 토양 및 바위, 그리고 수목(樹木)의 특색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회화의 조형적 특질은 20세기의 한국화가들인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허건, 박노수, 김옥진, 이열모, 나상목, 오용길, 이인실 등의 그림에서도 간취된다.(이들은 20세기 전반 '조선미전'에서부터 20세기 후반이후 주로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이다. 다만 변관식은 국전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이후 (극히 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고) 전통산수화의 정신성이나 조형적 요소에 기반한 회화는 거의 단절된 현실이다. 미술교육의 문제 및 여러 복합적인 요인 때문이겠지만 전통회화 및 근대 동양화라는 문맥을 계승한 한국화 전반의 침체 현상은 불과 수십 년 전 미술계에서 가졌던 위상과 비교해도 격세지감이 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금릉 김현철은 전통초상화 기법으로 현대인의 내면적 정신성을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공필법에 능한 화가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회화에서 계척(界尺)을 이용하여 궁궐·누각·가옥 등 건축물을 정밀하게 묘사한 계화(界畫)를 구사하는 필력까지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와 달리 조선 후기 그림의 주요 특성이기도 한 문인화적 간결한 필치 또한 숙련된 기법으로 구사한다. 작가는 동세대를 전후하여 다른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임(臨), 또는 방(倣)의 전통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보여준다.

최근 금릉의 그림들은 이전부터 보여 준 특성인 부감의 시선과 함께 실경산수의 소재를 더욱 넓혀 화폭을 가르는 수평선 아래 바다의 푸른 색감과 땅을 대비시키는 풍경이 많다. 제주 범섬을 그린 그림은 화면을 이분하는 수평선을 경계로 상하 화폭이 나누어져 마치 색면추상회화를 연상케 한다. 이러한 바다는 겸재의 〈월송정도〉나 〈청간정도〉에 그려진 바다와 달리 맑고 깊은 단색의 푸른색조로만 표현된다. 그런가 하면 작가가 그리는 산과 나무들은 겸재 식의 미가산법(米家山法) 및 수지법에다 김홍도의 〈옥순봉도(玉筍峰圖)〉 중에서도 대표작인 간송미술관 소장의 ‘옥순봉도’를 떠올리게 하는 깔끔한 필치를 보여준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서구의 풍경화와는 다른 미학적, 기법적 기반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러 상이한 요소를 지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 의미와 산수화 이미지와 달리 복합적 층위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 중 대작인 남도 끝자락에 위치한 ‘달마산 미황사’를 그린 그림을 보자. 겸재가 내금강 〈만폭동도〉를 그릴 때 시야에 들어오지 않은 비로봉까지 그렸듯, 작가는 이 그림에서 미황사를 품은 산 능선 뒤로 뒤에 보이지 않은 푸른 바다를 그렸다. (그래서 얼핏 보면 푸른 하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와 달리 미황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정면에서 본 광경이나 산이나 바위를 그리는 방식은 담백한 필촉의 윤기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전통 문인화의 특성이기도 한 대범하면서도 맑고 깨끗한 수직준의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이외에도 출품된 한 폭 한 폭이 사경(寫景)을 바탕으로 의경(意境)을 성취한 그림인데, 특히 도솔암을 그린 최근 그림은 극히 단순하게 절제된 청색(면)의 바다와 대조를 이루며 다른 그림에 비해 필치가 더욱 자유로워 부분적으로 묵흔의 번짐과 스밈까지 드러난다. 그럼에도 작가의 그림을 전체적으로 본다면 탁 트임과 심원한 경계의 공존, 이를테면 ‘허와 실, 곧 비움과 채움이 서로 어우러지면 그림을 그리지 않은 빈 공간도 모두 묘경이 된다(虛實相生 無畵處皆成妙境)’ 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주로 제주의 풍경을 담아 낸 작가의 최근 그림은 오랜 탐구의 소산인 전통회화의 방식에 기반 하면서도 더욱 확장, 심화된 조형적 요소로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에서는 한 자루 붓(筆)으로 만 리에 이르는 산과 물을 그리는 일도 무엇보다 ‘정신을 씻어서 맑게 하는 일(瀟洒之事)’이었다. 대상에 얽매일 수 있는 핍진한 형사(形似)보다 정신의 자유해방을 의미하는 사의(寫意)적 의경을 지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아도취적 경박한 필묵의 유희가 정신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작가의 그림처럼 '무엇에' 집중하며 '어떻게' 몰입하는가에 따라 전통회화에서도 얼마든지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감상자 또한 이러한 그림을 매개로 ‘마음을 맑게 하여 만상을 음미(澄懷味象)’할 수 있으니, 이렇게 보고 느끼는 세상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진경(眞景)’이다. 선선한 바람 불어 더욱 푸른 날 문득 낯선 가을처럼.

도병훈(미술이론가)


누구나 자신만의 바다를 품고 있다
금릉 김현철 개인전
2018.10.01~10.31
갤러리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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