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모작 - (0058) 심주 여산고, 99 X 200 cm, 한지에 수묵담채, 2002
              2. 경향신문  2002.11.12

<5회 개인展-임모와 사생>
제비울미술관
2002.11.01-11.30

남 따라 그리는 길, 내 정체성 찾는 길

  임모. 남제시대 사혁(479-502)의 6가지 화법 가운데 `전이모사'에서 비롯된 임모는 근대기까지 서화공부 및 연구에 절대적이었다. 즉 그림을 배울 때는 규범이 되는 그림을 모사해 그 법식을 완전히 소화해낸 뒤에야 창작의 길로 나갈 수 있다고 믿어온 수련방법이다.

  이웃나라 중국의 대학에서는 미술 및 감정학교육의 방법으로 임모를 지금도 중시하지만 우리는 해방후 대학교육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임모이다. 물론 임모가 독창성을 담보할 수는 없을지라도 `정체성 찾기'라는 정신 자세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나아가 전통 화법.서법의 체득없이 서화 평론과 감정을 성행하는 우리 현실을 고려하면 임모는 새로운 자리매김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임모와 사생'을 병행해온 한국화가 김현철(44.간송미술관 연구위원)가 과천 제비울미술관에서 30일까지 열고 있는 개인전은 시사점이 많은 전시회다. 작가는 조선후기 진경시대를 연 겸재 정선과 중국화가 곽희. 심주를 모사한 임모작과 순수 창작품들을 함께 전시해 지난 6년간의 수련과정을 보여준다.

  서울대 미대와 이 대학원을 나온 김씨가 처음 임모를 한 것은 1996년. 그 해 산수화로 첫 개인전을 가졌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산수를 제대로 공부하고 그려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김씨 역시 80년대 말 화단을 강타한 `황창배 신드롬'에 휩쓸려 물감을 `흘리고 뿌리는' 실험적 작업에만 탐닉해 온 터였다.

  "3년 가량 그런 행위자체를 즐겼어요. 시간이 지나다보니 `내 나이엔 이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 3년을 더 방황했습니다."

  그는 이 시대 진경산수에 도전해보겠다는 각오로 이후 산행에 나선다. 간송미술관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 겸재그림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겸재 연구를 위해 조선회화에 큰 영향을 끼친 북송때 화가 곽희 산수를 먼저 임모한다. 그의 그림 옮기기는 간송미술관을 중심으로 `진경학파'를 이끌고 있는 스승 최완수씨의 권유를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비단 그림인데다 기초자료가 부족해 3차례 실패끝에 겨우 첫 임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필을 알기 위해서는 서예에서 말하는 일획의 도를 터득해야겠다는 생각에 붓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필을 조금 알고 나니 가슴을 열어 줄  그 무엇이 필요했다. 곽희의 `조춘도'였다. 그는 한달음에 목포까지 달려가 `조춘도' 영인본을 상면하고는 일획의 벅찬 감동을 만끽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는 시야를 넓히기 위해 겸재의 임모에 착수했다. 한강 주변을 그린 `독백탄도' 모사때는 채색을 처음 시도해 보았다. 겸재 진경은 일일이 답사해 현장의 느낌과 화면 구성을 비교했다. 그리고 우리 그림에는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판단 아래 명나라때 문인화가 심주의 `여산고도'로 범위를 넓혔다. 섬세하고 복잡한 필법의 이 작품은 모사에만 꼬박 4년이 걸렸다.

  이번이 5번째 개인전. 전시장엔 그동안 사생한 관악산, 삼성산, 금오산, 속리산, 가야산, 영월 청령포 그림들이 보인다. 그는 미술사조의 변화가 더없이 스피디한 오늘날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평생 임모를 계속할 작정임을 맹세했다. 최근에는 전통 기법의 초상화 임모도 시작했다. 이 작가에게 임모는 창조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이 용 전문위원